도1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선생의 사상

          
독립전쟁 준비론
| 민주국가 건설론 | 흥사단 운동론 | 도산이 오늘에 주는 교훈

 

  도산은 우리 겨레가 하루빨리 일제를 몰아낸 다음에는 살기 좋은 나라를 세워 영원토록 번영을 누리면서 세계평화에도 기여해야 한다는 큰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이상적 국가에 대한 간절한 꿈은 때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말로 표현되어 나타나곤 했다. 한말에는 '독립 자유의 신국가' '유신(維新)한 자유문명국'이란 말을 썼으며, 3·1 운동 후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는 '모범적 공화국의 건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또 그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옛나라를 찾아 복스러운 새나라를 세우자'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新民主國)'이라는 표현도 볼 수 있다. 이들 모두가 그의 이상적인 민족국가에 대한 진지한 구상 속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한 말 일제시기에 도산이 염원했던 자주독립의 민족국가는 물론 대한제국의 계승이나 부활은 아니었다. 그가 세우려 했던 것은 당연히 입헌공화제의 근대민주주의 국가였다. 그는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삼선평연설을 통해, 군주제국가에 대한 철저한 비판의식과 국민주권사상을 명확히 보여 주었다. 그는 청년학생들에게 망국의 원인이 국가를 왕의 개인소유물처럼 여겨왔던 절대군주제의 낡은 정치제도에 있었다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이제는 종래의 신민의식(臣民意識)에서 벗어나 모든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국민의식을 확고히 할 것을 강조하였다. 심지어, 그는 아직도 대한제국의 관리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청년이 있다고 하면, 이는 망국의 심부름꾼이나 되려는 것이라면서 마땅히 신국민이 되어 신국가건설의 간성이 되라고 권고하였다.

그가 주도해 만든 신민회의 정치적 목표가 일제의 침략을 물리친 다음, 전혀 새로운 공화국가를 세우려 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때 당시의 국호가 대한제국이었고 또 도산이 늘 우리 스스로를 일컬어 대한이라는 말을 썼던 사실을 감안해 보면, 곧 그가 세우려 했던 국가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산의 대한민국 건설의 목표는 한말 신민회 운동을 통해서는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대신 10여 년 후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극히 불완전하게나마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1919년 6월 28일 임정의 각료로 추대된 인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내무총장에 취임한 그는, 취임연설에서 항구적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모범적 공화국'을 건설하자고 주장하였다.

한말 신민회 때부터 3·1 운동 후 임정 시기까지 도산이 생각했던 대한민국의 정치.사상적 성격은 특히, 미국을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임시정부의 헌장에는, 사유재산의 보유와 영업활동의 자유 및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등 국민들에 대한 제반 시민적 자유의 보장이 명기되어 있었다. 즉, 자본주의체제의 바탕 위에서 각종의 시민적 자유가 법률로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도산의 독립국가 구상은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을 건설하려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시민적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했던 도산의 건국구상은 192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사회 민주주의 국가 건설론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 같은 변화의 직접적인 계기는 1926년 7월 이후 중국에서 그가 앞장섰던 좌우합작의 대독립당운동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2∼3년 간의 대 독립당운동 과정에서 이루어진 도산의 새로운 독립국가 구상은 1927년부터 그가 주창했던 대공주의와도 직결되어 있는데, 정치적 자유를 근본으로 하면서도 정치·경제·사회적 평등을 매우 강조하는 특징을 가졌다.

대공주의는 도산이 독립운동가들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분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립한 것으로, 민족국가의 틀 속에서 사회주의의 이념을 최대한 수용하기 위해 정치·경제·교육의 평등을 강조한 평등주의적 사상 체계였다. 민주주의가 본래는 자유와 평등을 함께 담고 있는 개념이었지만, 역사적으로는 그것이 주로 부르주아 시민계급의 자유를 보장하는데 그친 한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는 전민족을 대상으로 정치적 자유는 물론이고, 경제사회적 평등의 실현을 더욱 비중 있게 반영해 좌우가 합작할 수 있는 민족운동 목표를 설정하려 했던 것이다. 즉, 정치적으로 보통선거제, 경제적으로는 토지 및 대생산기관의 국 유제와 교육에서의 국비 의무교육제 실시로 전민족 평등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안으로는 정치적 자유를 바탕으로 하되 특별히 사회경제적 평등이 강조된 신민주국을 건설하고, 나아가 밖으로는 민족간 국가간 평등에 기초해 불평등한 제국주의적 세계 질서를 극복함으로써 평화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이 1920년대 후반 이후 도산의 새로운 건국론이었다.

이 점을 특히 현대국가에서의 체제와 이념이라는 면에서 말하면, 순수 자본주의 체제나 전체주의적 공산주의 체제의 국가와는 구별되는 사회 민주주의적 성격의 국가 건설론이라 할 수 있다.

도산의 대공주의에 입각한 사회 민주주의적 후기 독립국가 구상은 먼저 한국독립당의 강령에 반영되었고, 그 후에도 임정을 비롯한 민족주의 각 단체의 정치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임정세력이 외세와 극좌·극우세력에 몰려 몰락함으로써, 현실정치에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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